약물이 공기와 같으면 좋겠다 - 오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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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계속 웃고 있습니다. 누가 욕을 해도 뭐라고 해도 나는 지금 매우 좋습니다. 나는 지금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앉아 있는 것만도 내게는 성공입니다. 약물에 취해 확 열이 오르면 빨가벗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미친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짐승만도 못하게 땅바닥을 기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또한 본드에 취해서 산에다 불을 지른 적도 있었습니다. 내 환상 속의 숲과 비교했을 때 현실의 숲은 너무 싫었습니다. 나는 산의 나무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정말로 싫었습니다. 짜증 이 났습니다. 그것이 타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불을 냈지만 불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산이 타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타 죽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맞는 말 같았습니다. 그 후 더 이상 불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약물을 하면 극단적으로 2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약물이 악이기 때문에 선과 악만 볼뿐입니다. 그래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없애버릴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도 지르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가능한 좋은 쪽으로 보고, 생각하고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본드를 하다.

   5형제 중 막내지만 내가 태어날 때 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전 재산을 잃게 되자, 형들은 부모님의 사업을 돕기 위해 나서느라 부모 형제로부터 아무런 정서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돈이 없으니 오락실에서 훔치기도 하고 공짜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비슷한 동네 선후배들끼리 어울리게 되었고 함께 훔치기도 하는 등 많은 사고를 치고 다녔습니다. 이런 것에 재미를 붙여 점점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4, 5학년 때부터 학교에 가는 둥 마는 둥 하였고, 6학년 때는 거의 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담배를 피웠고 본드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친구들이 약물을 하는 과정에서 공중으로 퍼져나간 냄새를 맡다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 해보았는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중학교에 입학한 다음 등록금을 갖고 가출하면서 학교는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동네에서는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여관, 여인숙, 그리고 돈이 더 없으면 서울역 근처의 쪽방에서도 생활하였습니다. 당장 잠자리를 마련하는 등 먹고 살기 위하여 도둑질 등 다양한 짓거리를 하였습니다. 재미와 스릴을 느꼈지만 죄책감은 없었습니다. 소매치기도 배웠습니다. 몇 년 전까지도 소매치기에서 손을 끊은 지 오래됐는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곤하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본드를 하다.

   본드는 좋아서도 했고, 심심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도 했습니다. 또 배도 고팠고, 잘 곳도 없어 밤거리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본드를 하면 열이 많이 올라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약에 취하면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10대 중반 때는 막걸리 통에 넣어 길거리에서 불고 돌아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여럿이서 함께 하니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하지는 않았습니다. 없으면 안하고 놀러 다니는 등 자기생활도 하였습니다. 이때는 하면 보통 깡통 하나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교도소 생활이 더 편안하다.

   14살 때 절도로 교도소 생활을 하기 시작하여 30대 중반에 14범 정도가 되었습니다. 처음 두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해화학 물질 관리법 위반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약물을 하다가 잡혀간 적도 있지만 보통 교도소에서 나와 3개월 정도 사회에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유해화학으로 잡혀 1년 정도 교도소생활을 반복하였습니다.

   사실 재판받는 것이 싫고 귀찮아서 그렇지, 교도소의 생활이 몸에 배여 더 편안했습니다.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일도 조금 하고, 돈도 필요 없고, 밥도 무료로 주지, 잠 잘 시간에 자고, 종교생활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또 생각할 시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공부하기 싫어했던 것도 있지만 약물로 인한 징역은 보통 8월에서 길어야 1년 6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느낀 것도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시간의 소중함이었습니다. 교도소에서 봉투 접기를 하면 한 달에 1만 2천원 정도를 벌었습니다. 밖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교도소에서의 시간이 너무 값어치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에서는 자유시간도 없고 책 볼 시간이 없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집은 약물을 억제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취해서도 말을 합니다. 한번은 취해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 엄마,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내가 하는 것이 아녀. 내가 움직이고 싶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야. 나는 가만있고 싶어. 그런데 내 몸둥아리는 저절로 움직여. 막 돌아. 엄마, 나를 좀 잡아줘.”엄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울었었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한번도 신고하지 않으시고는 말없이 깡통만을 파묻으셨습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참 안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약물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공기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공기라면 매일 할 수도 있고 굳이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없고 또 붙잡혀 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그만큼 약물을 사랑했고 취했습니다.

   부모님들은 나를 어떻게 치료할지를 몰랐습니다. 우리는 약물치료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치료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형들과는 내가 약물에 취해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더욱 말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마 형들의 물건을 몰래 갔고 나오다 보니까 형들과의 관계도 더 멀어진 것 같습니다. 큰 형은 저만 보면‘저 녀석은 몇 달이면 또 들어갈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나는 그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또 하고 그랬습니다.

   집은 나에게 약물을 억제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면회도 오고했지만, 계속 교도소에 왔다 갔다 하니 더 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출소할 때 집에서는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습니다. 출소하는 사람과 함께 어울렸다가 집에 돌아오면 보통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배운 것이 그 짓이라고 또 하게 되었습니다.

   또 집을 나와 한두 달 돌아다니며 약물을 하게 되면 몸이 아주 마르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가 살이 좀 붙은 다음에는 다시 집을 나와서 하거나 하다가 교도소에 잡혀가곤 하였습니다.

중독성이 더 심해지다.

   내가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생활을 하는 동안, 옛날에 함께 사용하면서 어울렸던 친구들은 더 이상 하지 않았고 각자 자기들의 생활을 위해 흩어졌습니다. 점점 혼자하게 되었습니다. 외톨이가 되다보니 더 심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단약을 하기 전까지도 점점 더 중독되어서 인지 본드가 없으면 제 발로 저절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끊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으니까 하다가 던집니다. 조금 있으면 버린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구입하여 하다가 버리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중독 때문인지 손을 댔다하면 주기장창 코를 쳐 박고 있었습니다.

   살 빠지는 것과 좀 이상하게 걷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몸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의 제품은 첨가물을 넣어서 그런지 질이 떨어져, 하면 이상한 쪽으로 쏠려 가게 되고 머리가 띵해지고 중독성은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송천재활센터를 찾다.

   지난봄에 마지막으로 교도소를 나왔습니다. 사회에 나왔더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PC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밥을 먹으려고 아는 식당에 들어갔더니 주인이‘많이 말랐네, 무슨  걱정이 있니. 너 몸이 안 좋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갔다가는 다시 재발할 것 같았습니다.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송천재활센터를 알려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재활센터에서 프로그램을 받으면서 사람과 생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단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물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유혹에 들다.

   재활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니 명절이 되어 고향에 갈 수 있었습니다. 고향에 도착하니 다시 약물이 생각이 났습니다. 갈등을 하다가 천운에 맡겨보기로 하였습니다. 철물점이 두 곳 있었습니다. 한 집은 닫혀있었습니다. 아 50%는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집으로 들어가니 본드가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사자마자 바로 했겠지만) 사서 가방에 넣고는 집까지 40분 동안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 차가 보였습니다. 아마 어머니만 있었다면 또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있는 상태에서는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차를 보고는 본드를 숲으로 던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숲에서 다시 찾아 가방에 넣고는 할 틈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작은형이 전화로 얼마 후면 집에 도착한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작은형 식구들과 놀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작은형은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로 간다고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냥 집에 있기도 뭐해서 따라 올라왔습니다.
 
   다음날부터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미련 없이 던져 버렸습니다. 숙소에서 아침 일찍 눈을 떠 보니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본드를 향해“그래 너는 그 자리에 그냥 있어
라”하고 나는 계속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에 부딪히며 단약의 힘을 키우다.

   아직 약물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단약을 성공했다기보다는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시간이 많고 여유롭다면 약물이 또 생각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송천재활센터에서도 나름대로 일을 통해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단약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을 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다만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하여 또 약물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부딪쳐보고자 합니다. 어차피 집에는 가야 되니까요. 앞으로 더 나아지겠지만 안한다고 자신은 못하지만 부딪쳐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에 집에 가더라도 일부러라도 계속 부딪쳐 보고자 합니다.

   교도소에 나오자마자 바로 하다 잡혀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약물로 완전히 망가진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약물은 내가 힘들었을 때 많은 도움을 준적도 있었습니다. 내가 지난 25년 동안 약물을 찾아 듯이, 약물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어떤 일을 찾고자 약물에 했던 것의 반만이라도 노력한다면 결실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약물을 통해서 보았던 환상 속의 행복을 지금은 조금씩 현실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에 재미를 갖고 있습니다. 노력하면서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조금씩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기쁨을 느낍니다.

효도를 하고 싶다.

   아버지는 본드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것만 바라십니다. 나도 단약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밥 3끼를 매일 같이 먹는 것도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아직 부모님이 나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좋은 여자를 만나 더 열심히 산다면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너무 많이 부족합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대인관계를 통해 서서히 배워나가고자 합니다. 현실에서 부딪혀 가면서 더 열심히 살아가고자 합니다.

 
<2007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2"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