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없다 - 오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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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축하합니다.’핏덩어리 조카,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도 보지 못한 아이에게 생일상을 차려 주며 고모는 항상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야 한다고 속삭였습니다.

마약사범인 동생 법정에서

   3년 전, 4월 어느 날. 따스한 봄기운에, 눈꽃처럼 환하게 피어난 벚꽃은 착잡한 나의 심정을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날은 동생 재판이 열리는 날로, 법의 부름에 따라 나는 증인으로 참석하여야 했습니다. 드라마나 소설 속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고박정희 대통령 아들과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마약이 바로 손아래 남동생에게까지 독버섯처럼 뿌리내렸을 줄이야.

   아침 9시뉴스를 통해 마약 단속반 사무실에서 머리를 아예 잠바로 덮어 씌워 수그린 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나를 참담하고 가슴이 아려오게 했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처럼 태연한척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옆집의 주부가 현관문을 열고“언니 커피 한잔해요.”하며 들어와 거실 TV앞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가속으로 채널을 바꿨습니다.

   마약은 동생의 육체와 영혼까지도 삼켜버렸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영특하고 활동적이었으며 부모님께 효자였던 동생이 어느 순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변해버렸습니다. 추억 속으로 사라진지 오랜 빛바랜 흑백 사진의 자전거에 태우고 운동장을 돌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법원 앞 벚꽃 그늘 아래에서 30분쯤 서 있을 무렵, 멋지지도 않은 대형 교도소 차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으나 철창으로 가려져 차안의 사람들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엄마와 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곧바로 교도관 인솔 하에 허리 가는 불개미 행진처럼 일렬로 줄지어 밧줄로 허리와 손을 여러 번 동여매고 고개를 떨 군 채 버스에서 나오는 모습에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안타까움에 몸서리 쳤습니다. 무슨 죄인지 모르지만 청소년들이 밧줄로 조기 엮듯이 줄 지어 가는 모습에 너무나도 가슴 아팠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가 되었습니다. 마약 재범인 동생은 손과 허리가 꽁꽁 묶어져 앞 선두 여자를 따라 재판장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아버지를 증인으로 세워 부자간의 본능으로 죄를 덜어보려고“모릅니다.”, “ 생각이 안 납니다.”가 대답의 전부였습니다.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처지였습니다. 이어 나의 증언 차례였습니다. 동생과 낯익은 두 여자는 맨 앞좌석 양 쪽 변호인 사이를 두고 심문을 받았고, 나는 처음 선서대로 간단명료하게 답했으며 앞 사람들과는 달리 동생의 죄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오히려 무언가 굽어진 철판에 간절하게 망치질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마약으로 인한 동생의 성격파탄

   몇 년 전, 교양이 물씬 풍기는 􄤨􄤨여대 음대를 졸업한 여자와의 결혼식 전날 밤, 동생은 그녀에게“과거에 사귄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서슴없이 쉽게 수수께끼를 풀어버려 동생의 의심 병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바로 동생은 말라빠진 명태처럼 그녀를 마구 두드려 패 온 몸이 피멍들게 하였습니다. 그녀의 눈두덩은 아예 푸른 계열 화장 색으로 덧발라 얼핏 봐서는 눈치 채지 못하게 하였으나 움직일 때 마다 반소매 속으로 멍든 자국이 보여 물어보니 그녀는 주눅이 들어 몸을 파르르 떨며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이, 아예 나에게 몸 전체를 보이며 앞으로의 상황을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 동생은 이미 마약중독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한순간에 동생으로부터 일생에서 가장 치욕스런 경험을 했어야 했으며 피멍이 가시기도 전에 꽃들이 만발한 어느 산 근교에 자리 잡고 있는 􄤨􄤨웨딩홀에서 마음에 없는 결혼식을 올렸던 게 그녀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 동생은 서울에서 또 다른 여자를 사귀어 내가 살고 있는 고향 􄤨􄤨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여름철 피서를 누나인 나와 같이 홍도로 떠날 것을 제안하여 나는 남편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흔쾌히 허락하고 홍도행 배를 탔습니다. 바닷바람은 모처럼 집을 떠나온 내 머리를 상쾌하게 해 주었고 선착장에서 유람선으로 이동할 때 발이 미끄러져 넘어진 이외에는 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동생은 계속 뱃머리 앞에 앉아 비디오 동영상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에게 시선을 모으고 아름다운 배경을 담느라 애를 썼습니다. 온종일 구경하느라 지치고 배가 고픈 우리는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평상에 자리를 잡고 뜨거운 생선 매운탕을 시켰습니다.
 
   맥주를 석잔 정도 주고받으며 마시는 도중 갑자기 돌변한 동생은 나에게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뜨거운 생선 매운탕이 놓이자 식탁을 송두리째 들어 엎으려 하자 옆에 있던 그녀가 말렸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여지없이 발길질과 주먹으로 그녀 머리를 치기 시작했고 식당 안으로 도망가다 잡힌 그녀에게 맥주병을 깨들고 찌르려해 남편이 간신히 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계속 싸움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우리는 그의 손에 피가 흘러내린 것을 보고 계속 이어지는 그의 변태의 속물이 되기 싫어 그 자리를 떠나 바로 숙소로 돌아왔고, 다음 날 배편으로 돌아간다는 말만 전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누나로써 동생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어 마음속의 사악함을 떨쳐주고자 그를 교회로 인도해 설교를 듣게 했으나 단지 그는 약속했던 나와의 말대답뿐인 것 같았습니다. 처음 그를 본 목사님은 선 채로 잠깐 묵념한 다음 동생과 악수하면서 동생의 흉터 자국을 발견하고는 사고뭉치란 것을 예감한 듯이 재빠르게 자리를 빠져 나갔습니다. 동생은“누나가 목사한테 무어라고 말했어?”하며 나를 힐끗 째려보았습니다.

동생으로 인한 가족의 피해

   어느 날, 동생은 나의 신용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고급 아파트 20평 전세 값과 맞먹는 고급차 ‘에쿠스’를 뽑아 밤낮으로 질주하며 계속 누가 따라오기라도 하듯 도망 다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누군가 신고할 것이 두려워 자신의 차는 차고에 아예 넣어 두고 남의 차만 이용하려 했습니다. 밤중에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에 핸드폰을 묻어두고는 그 다음날에는 찾으러 가고 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또한 한 달이 멀다하고 나의 집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는 등 몇 번씩 집을 옮겨 다니는 바람에 이사비용과 집세 계약금으로 대출금을 다 소비해버렸습니다. 아예 도로를 돈으로 도배하고 다닌 그에게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부모 형제들은 신경을 곤두서게 되었으며 안정되지 않고 불안에 휩싸이게 되어 나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보증을 섰던 나는 결국‘신 불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리스트에 올라 내 삶에 걸림돌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가정불화도 일어나 견딜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한 핏덩어리 때부터 떨쳐놓았던 자신의 아들을 그나마 어렵게 길러온 자신의 어머니와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그 아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교육시킨다는 이유로 허구한 날 때리려 쫓아다녀 노약자인 어머니와 아들을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동생이 나더러 집에 들어가 시계와 반지 그리고 침대 밑에 플라스틱 원통으로 된 버려진 것이 있으니 가지고 나오라고 시켰습니다. 나는 이 하찮은 것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신신 당부하는가 하는 호기심과 두려움에 손이 떨렸지만 뚜껑을 열고 솜을 거두자 하얀 은백색 가루가 보였다. 동생은 바로 집에 안주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며 스스로 백 명의 경찰이 자신을 쫓아온다며 미쳐 날뛰고 밤새 도망 다니느라 잠을 못 잤습니다. 날이 갈수록 몸은 쇠약해져갔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동거녀 눈두덩이의 반창고가 말해주는 것처럼 동생 몰래 그녀는 나에게 자백이라도 하듯이 팔을 걷어 제스처를 해 보이며‘뽕’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해오며 묘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동거녀도 이미 마약에 젖어들어 오히려 평범한 삶을 포기한 채 동생과 같이 더불어 행위를 즐기고 도우며 공범이 되어 도망 갈 신세도 못되었습니다. 어느 횟집 주인과 이유 없이 난투극을 벌여 결국 동생을 그대로 놔뒀다가는 그 미친 광란의 질주극으로 인해 더 큰 인명피해가 올 것 같았습니다.

신고, 그리고 감정의 악화

   그녀를 통해 마약을 투여한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우리가 그들을 구출해야 된다는 생각에, 모친은 모질고 독한 마음으로 􄤨􄤨마약단속반 김􄤨􄤨씨에게로 연락, 자진 신고를 하자 경찰에서 우리 집까지 수색했습니다. 동생은 조급한 마음에 나에게 구조의 손길을 요청해왔으나 난 쓰라린 아픈 가슴을 간신히 부여안고 그대로 최후의 결단으로 연락을 끊었습니다.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동생은 에쿠스를 타고 도주하여 3일 만에 서울 근교에서 경찰청 사람들에게 검거되었습니다. 분신 같았던 빈차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은 동생의 파멸을 말해주는 듯 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는 동생의 겨울나기를 위해 이불과 속옷을 사들고 동생을 면회했습니다. 동생은 성난 하이에나처럼 으르렁대며 더욱 포악했으며 나에게 XX년하고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칼로 찌를 듯 했고“너는 나가면 죽을 줄 알라”하며 반성의 기미는커녕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교도소 규칙에 의해 끝내 아픔을 가슴에 묻고 준비해간 이불과 속옷은 전하지 못 하였습니다. 면회 후 동생이 악랄하게 대한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악몽에 시달려 심장병으로 악화되어 깊은 잠을 이루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잡혀간 것이 동생에게는 마약중독의 덫에서 벗어나 불안과 고통에 시달린 생활을 벗어날 수 있고 어두운 장막을 드리웠던 가정과 사회도 한층 밝아진 모습을 떠올리니 십년 전 응어리진 가슴이 확 뚫린 것도 같았습니다.

   동생은 초범이었을 때 모 술집 종업원에게 술에 마약을 타서 마시게 하다가 그 여자 종업원이 경찰서에 신고하여 1년6개월 형을 살았습니다. 그 후 정신 못 차린 동생은 또다시 6개월 후에 죄를 범하여 2년6개월 형을 선고받고는 형량을 줄이려고 구치소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애원하며‘너 경찰서장 상을 받았으니 복사해서 부쳐 보내라’하여 하는 수 없이 보내주었습니다. “나와 같이 훌륭한 학생을 계속 육성하기 위하여,”아빠를 빨리 나오게 해달라는 동생 아들의 편지 내용 및 상장 복사본과 탄원서를 재판장께 보냈고 재판장님의 배려로 6개월 정도 감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수형생활 중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속 해서 집으로 협박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의 아들 학교에도 편지를 보내어 선생님들에게 빨리 나오게 해 달라며 서명을 받은 진정서를 부탁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은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이런 행동에 경악하였고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바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못해 화가 난 우리 형제는 오히려 동생의 수형기간이 짧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수개월이 지나도 반성하지 못 한 동생에 대해 법원에 진정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영원히 사회와 격리시켜 달라”는 우리의 진정서를 동생이 갖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입장에서 부모형제가 고발 한 것도 억울하였는데, 우리의 진정서는 그를 배신감과 더불어 곱절도 더 강한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지난 해 마지막 망년회를 보낸 이른 새벽, 동생은 출소하자마자 우리 집 아파트 문을 쾅쾅 두드리고는 인기척이 없자 구둣발로 차며 아파트 동 전체가 떠들썩하게“􄤨􄤨 XX년 기어 나오기만 해봐라 죽여 버리겠다.”며 고함을 세 번 지르고는 재빠르게 달아났습니다. 그 후 난 불안 때문에 회사도 그만 두고, 신께서 부여한 혜택도 멀리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동생은 천벌을 받아 마땅할 일을 또 한 번 저질렀습니다. 동생은 지옥 같은 감옥생활을 떠올리며 복수심에 불타 기어이 모친의 머리를 주먹으로 쳤고 또 신고할까봐 사건을 은폐했습니다. 동생의 아들도 자신의 애비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학교도 휴학하고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숨어서 살고 있습니다.

바람 -“ 용서와 화해, 그리고 마약 없는 세상을 위해”

   제발 이제라도 다시는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린 마약이 근절되어 사라지고, 우리 부모 형제들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여 다시 제기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펼쳐진 온 국민이 그토록 소원하였던 휴전선을 넘어 아아! 감격스런 57년 만의 이산가족의 상봉을 떠올리며, 열광과 환호 속에 어느새 난, 저“철마”에 몸을 싣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마약 없는 세상을 위해”

 
 
<2007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2"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