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부채는 여전히 육중하지만 - 황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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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비정규직의 가파른 능선을 넘고 있는 나이 마흔 아홉의 필부입니다. 작년 국회에서 비정규직 법안이 처리됐습니다. 하지만 나같이 각박한 처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법의 내용이 나에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는 속 빈 강정이기에 마치 빈집의 벽에 페인트칠만 한 허울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면 나와 같은‘특수고용직’이란 형태의 비정규직 세일즈맨에겐 나를 고용하고 있는 직장에서조차도 그‘하찮은’건강보험마저 수혜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같은 주장의 반증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 우리 직원들끼리는“우린 4대 보험의 수혜대상이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보다도 못한 부평초와도 같은 신세”라고 자조하곤 합니다.

   아무튼 나는 작년에 뜻 깊은 은혼식을 맞은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있습니다. 더불어 올해 대학을 휴학하고 계약직 사원으로 돈을 벌고 있는 아들과 서울대를 다니는 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은혼식 때도 돈이 없어 여행조차 함께 못 한 아내에겐 지금 역시도 큼직한 미안함이 어깨까지 짓누릅니다. 아들의 휴학 연유가 가정경제의 빈곤이기에 그 책임자인 나의 입지는 매우 좁습니다.

   주식도 바닥까지 내려오면 반드시 반등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내 처지가 그러하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여 오늘도 나는 새벽 일찍 출근합니다. 더욱 부지런을 떨어 돈을 더 벌고 그래서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고자 한껏 노력할 작정으로!

   엄동설한에 출생한 나는 애당초 가난하게, 그리고 불행까지 떠안고 태어났습니다. 우선 나를 낳아주신 생모가 부친과의 이런저런 곡절로 내가 첫돌을 즈음한 무렵에 그만 우리 부자를 떠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께서는 혼인신고도 않고 사셨던, 즉 법적 정혼이 아닌 동거의 형태였음에 두 분의 파경은 서류상으로도 번거롭게 이혼신고니 뭐고 할 것조차 없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나와 아버지를 떠난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하는 나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눈물의 질곡으로 작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너무도 이른 이별의 곡절은 당시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주먹으로 행세하셨던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외할아버지의 강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대학까지 나온 간호사였다는데 어찌어찌하여 부친을 만나게 되셨답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어 나라는 사랑의 귀결물까지 얻게 되자 어머니는 친정아버지의 독촉을 따라 아버지께 간청하셨답니다.

   “이제 주먹으로 먹고사는‘무식하고 천박한 짓’은 그만 두고 아무 기술이라도 배워서 남부끄럽지 않게 살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른바 지역 주먹계의 보스였기에 부하들이 걷어다 주는 돈을 만날 물 쓰듯 했던 아버지의 귀에는 아마도 우이독경 이었던가 봅니다. 결국‘싹수가 노랗다’는 판단을 내린 고고한 선비 기질의 외할아버지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딸을 개가시키고자 나와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딸을 빼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 어머니는 떠나셨고 어언 50년 가까이나 되는 지금껏 생모의 얼굴을 그림으로조차도 그릴 재간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아무튼 한 아이의 아버지라곤 하지만 아직도 혈기왕성했고 더불어 건달세계의 특성이자 어떤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돈과 술과 여자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던 20대 아버지는 나 하나만을 보고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수소문하여 당시 같은 동네서 살고 계셨던 한 할머니께 나의 양육을 부탁하셨습니다. 박복하셨던 유모할머니는 둘이나 되는 아드님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는 참척을 당하신 때문에 나를 지극정성으로 키워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돈과 여자와 술로도 부족하셨던지 언제부턴가는 마약에까지 함몰되셨습니다. 당시는 내가 어렸기에 마약에 찌든 아버지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낼 순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유추가 가능한 건 마약사범의 거개가 그러하듯 아버지 역시도 마약에 찌들었을 당시의 모습은 자못 그로테스크 했으리라. 헌데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제조치로 아버지는 마약투약과 조폭 두목이란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가자 할머니는 매달 받았던 내 양육비를 받지 못하게 되어 무척 곤궁한 삶을 사셔야했습니다. 그러했음에도 할머니는 내가 십 대 후반 무렵 운명하실 때까지도 변치 않게 친손자 그 이상으로 사랑하고 아껴주신 진정 천사와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 큰 은공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나는 지금도 설날과 한식, 그리고 추석이 되면 반드시 아버지 산소에 이어 그 윗자락에 위치한 유모할머니의 산소에도 성묘를 합니다.

   하여간 한참 뒤 교도소에서 출감하신 아버지께선 한동안 우두망찰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크게 망연자실 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화려했던 건달세계,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화려했던 주먹세계 보스의 자리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일장춘몽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수형생활로 아버지는 성공적으로 마약에서 탈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음에 몰고 올 또 다른 불행의 단초였음을 어찌 알았으랴. 이후 아버지는 지인들의 천거로 시외버스 정류장 배차원이라는 직업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정류장의 유일한 배차원이자 과거 지역 주먹계의‘황제’였기에 월수입은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으며, 비록 배차원이라곤 해도 누구도 감히 아버지를 업신여기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직업도 얼마 가지 않아 중도하차 해야 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상투적이고 고질적인 음주벽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마약은 끊었지만 그 마약 투약의 후폭풍인지 아버지는 술을 한 번 입에 댔다 하면 통상 보름 내지 20일 이상이나 조석으로 마셔대는 폭음을 거듭했습니다. 그처럼 과도한 술로 아버지는 시나브로 무너져갔습니다. 이같이 술에 의존했던 아버지의 나약한 심성의 발로는 아마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짧았던 주먹계 보스시절의 어떤 향수를 동경하는 발로가 그 근저이기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생업의 자리 역시도 결국 남에게 넘어갔습니다. 더욱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더 가파른 폭음으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 졸업 이전부터 실질적은 소년가장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고향역 앞에서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하셨던 시외버스 정류장의 행상을 했는가하면 공사장의 노동도 모자라 공장의 공원 등 별의별 궁상맞고 험한 직업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무심한 세월은 여류하여 아버지는 진작 작고하셨고 나는 지천명의 초입에 와 있습니다, 과거
엔 그 토록 애간장을 태우게 하셨으며 원망의 대상으로까지 각인되었던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떠나신 지가 어언 20년도 넘고 보니 때론 사무치게 그리운 때도 많습니다. 폭음으로 아버지는 불과 갓 오십을 넘기시자마자 그만 이승과의 끈을 놓으셨던 것입니다.

   선친이 남긴 빈곤이란 부채와 어머니에 대한 증오의 벽을 더욱 두껍게 쌓으면서 하지만 그 반대급부의 선상에서 나는 두 아이를 사랑과 칭찬으로 키우는 데 전력투구했습니다. 고진감래는 허상이 아니었음인지 아이들은 모두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라 주었고 효심 또한 바다처럼 깊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는 나에게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점철하게 하는 단초였습니다. 셀 수 없는 숱한 나날을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어쩌면 복수의 칼을 원도 없이 새파랗게 갈곤 했습니다. 비록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는 분이시지만 이젠 정녕 어머니를 용서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가출은 모진 시련의 극점을 두루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또 어떤 반전의 요체로도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아내와 자녀를 남들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은 사랑하게끔 만들어 준 자양분이었습니다. 더불어 어떤 반면교사의 거울이었음에 이젠 그로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까지를 모두 상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언 26년을 변치 않게 잘 살아주고 있는 고마운 아내입니다. 여전히 가난한 필부의 아낙으로 애면글면 어렵게 살고는 있으되 두 아이를 잘 길러냈으며 내조 또한 훌륭한 명실상부한 현모양처입니다. 이렇게 자랑하는 나도 실은 몇 번이나 이혼의 위기와 조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강조하건데 내게는 어떤 반면 교사적 교훈과 비가 온 뒤의 땅은 더 굳어진다는 진리까지 보는 천착의 혜안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내가 너무도 어렸던 즈음에 일어난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극명한 상흔의 아픔이 지금껏 잔존하는 때문입니다.

   내가 고작 핏덩이였을 무렵 이혼하신 부모님을 말미암아 지난 세월 나의 지나온 역정은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도 모자라 험산준령의 가시밭길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너무도 빠른 부재는 아버지마저 좌절의 늪으로 밀어 넣는 악재로 작용하여 늘 그렇고 독주로서 자학하며 사시는 단초가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외롭고 가련하게만 사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자면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무튼 그러한 극명한 아픔을 여전히 가슴속에 켜켜이 지니고 산 때문으로 나는 아내와는 반드시 백년해로하리라 작심했고 이를 지금도 하나의 신앙으로 지켜왔습니다. 진부한 얘기겠지만 가정의 행복이란 가장이 오롯한 사명감으로 마약류와 같은 물질엔 눈길조차도 주어선 안된다고 확신합니다. 아울러 배우자와 가족 모두를 아름답게 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미움과 탐욕의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 나무엔 악과가 열리지만 사랑과 미덕의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 나무엔 선과가 열리는 법이듯 말입니다.

   한 때 마약사범이었던 선친께선 나에게 가난과 불학이란 옳지 못한 유산만을 채무로 남기
고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악덕채무는 나를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살게끔 토양을 제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약류 의존행태와 그것이 불러들인 잇따른 어이없는 인생실패, 그리고 폭음으로 인한 가히 행시주육과도 같은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진작부터 다짐하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건 바로 나는 멀쩡한 사람을 일순간 폐인으로 만드는 마약류는 반드시 쳐다보지도 않을 것임은 물론이며 가정과 가족을 위한 희생과 봉사엔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작심을. 그래야만 소중하기 짝이 없는 가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늘 그렇게 화목한 가정을 견지하리라는 초발심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친께서 남긴 부채는 여전히 육중하지만 어제의 아픈 기억과 어두운 그늘을 거울삼아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는 자세 역시 잃지 않을 작정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에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마약은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가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내 삶의 영원한 버팀목이었음을 거듭 확인하고 상기하면서 나는 내일도 새벽길을‘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진군 하는 성실한 가장이 되고자 합니다.



<2007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2"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