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날거야 - 지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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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나는 충북의 한 소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원래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단양 등 이곳저곳 이사를 했던 기억뿐, 나의 삶이 시작된 곳은 바로 그 소도시로 이사 온 7살의 초등학생 때부터입니다. 그곳은 바로 제 2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위로는 3살 위 누나와 한 살 위 누나가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 붐이 한 창 일어났던 암울하고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대 탓이었는지 큰 할아버지께서 아버지 몰래 한 살 위 누나를 어딘가로 입양을 보내어 지금까지 생사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도박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도무지 갚을 여력이 없게 되자 아버지와의 다툼이 심해졌고 결국 어느 날 밤 자식들을 버리고 멀리 떠나셨다고 합니다.

   꼬마아이였던 나와 큰 누나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 식구가 이 소도시로 이사 와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직장을 다녔고 매달 월급의 반을 할머니 통장으로 부쳐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우리 세 식구는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지만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엄마, 아버지를 애타게 찾거나 그리워 한 적이 별로 없었던 아이였습니다. 또한 철부지인 나는 그저 오락실과 딱지치기, 숨바꼭질 등 아이들 놀이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어린이였습니다. 중 2때까지도 공부는 반에서 중간정도였고, 동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학교와 집 밖에 모르는 보통 아이였습니다.

낯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불량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3학년 봄에 영세민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못사는 사람들이 이 아파트로 대거 이주해 왔습니다. 바로 불량청소년들이 많은 곳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학교를 전학하지는 않았지만, 방과 후에는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았던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낮선 선후배 즉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할머니와 단 둘이 생활하였는데 사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낮선 환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목말라 했었습니다. 또한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고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들의 춤을 배우고 싶어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춤을 배우고 이런 과정에서 술과 담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숨어서 하던 술과 담배를 공원 한복판에서 판을 벌릴 정도로 심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불량청소년들 사이에서 본드를 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드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일 친한 친구였던 강􄤨􄤨가 다른 곳에서 본드 하는 것을 배워 와서는 권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본드를 처음으로 불게 되었습니다, 본드가 주는 환상과 쾌락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본드를 불며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난 이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며 도둑질, 폭력, 노상강도 짓 등으로 나의 욕구를 충족시켰고 친구들과 함께 비슷한 또래 여자들에게 못된 짓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점점 친구들과 어울려 본드를 하게 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불량친구들도 본드마니아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한 달에 2 ~ 3번 정도 본드에 취했던 것 같습니다.

   약물을 한 상태에서는 자아와 이성이 흔들리기 때문인지 그러한 행동들이 나쁘다거나 범죄라고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나의 인격은 악하게 변해갔고, 본드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친구와 가족보다 본드가 더 좋았고 나의 관심은 온통 본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으며 본드를 하지 않은 맨 정신에서는 도무지 삶의 재미와 유익을 맛 볼 수가 없었습니다.

‘유해화학’으로 수감되다.

   그러던 중 난생 처음 경찰서 유치장에‘유해화학’이라는 죄명으로 수감되었습니다. 다행히 초범이고 고1학생이었기 때문에 금방 풀려 날 수 있었습니다. 사회에 다시 발을 내딛은 나는 그때까지도 약물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또 계속적으로 본드를 흡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의 노여움을 샀던지 혹은 방탕한 모습을 도무지 참을 수 없으셨는지 또다시 같은 죄명으로 구속되었고, 이번엔 10개월의 형량을 받고 􄤨􄤨소년원으로 넘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결석일수 70일이 넘으면 자동으로 자퇴처리가 돼서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10개월을 살고 나온 후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동네에서는“본드 하는 놈”으로 소문이 쫙 퍼져 친구의 부모들이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자연히 정말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었고, 주위에는 더욱더 불량 친구들만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유흥업소 웨이터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때까지도 약물에 벗어나지 못한 나는 틈틈이 하였고, 남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골목길이나 야산 같은 곳에 가서 밤낮으로 본드를 분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웨이터일도 그만 두게 되고, 그냥 집에서 놀면서 집안에서 본드를 불며 할머니를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아파 잘 걸어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몸으로 할머니는 자꾸만 본드를 불지 말라고 하시며 빼앗곤 하여, 나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자꾸 본드가 담긴 봉지와 니스 병들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할머니께 대들기도 하고 뺏기도 하고 욕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내안에는 악마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회 탓, 가정 탓으로 돌리며 삶의 권태를 느낀 나는 처음으로 동맥을 칼로 그어 자살까지 시도하였습니다. 또한 번은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뛰어내릴까 하는 자살충동도 느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좀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더욱더 약물에 빠져 들어갔는데 함께 어울렸던 불량한 친구들 대부분은 본드를 하다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다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만 외톨이가 되고 약물을 하는 악순환만 계속 되었습니다.

악순환은 계속 되다.

   교정시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바로 약물에 취한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집에서 쫓아내려 하셨고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의 외면은 더욱더 심해져갔습니다. 누구 하나 나를 똑바로 일으켜 줄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도 새롭게 살려는 마음을 먹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들같이 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도무지 길이 열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 나를 그렇게 신경써가며 돌봐주려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0대 중반까지 교도소를 들락날락 하면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도소에 있을 때 할머니께서 임종하셔서 손자 얼굴도 보여드리지도 못하였고 주위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얻은 거라곤 전과기록과 사회의 냉대와 질시뿐이었습니다. 중독성을 망각한 채 심심하든, 기쁜 일이든, 뭐든 본드를 하게 된 것은 아까운 10대와 20대 청춘의 반을 본드와 맞바꾼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화나게 하고.

   교도소 생활, 치료감호소 생활을 하였지만 무엇보다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치유(완전한 회복)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치료는 받았지만 내 안에 본드 충동이 조금도 줄지 않는 바로 그것이 나를 미치고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는데, 본드를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던 점입니다. 어릴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본 나는 교도소생활 틈틈이 성경을 보았고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도하면서 도와달라고, 약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재활의 길을 찾다.

   치료감호소 약물병동의 간호사께서 NA모임과 송천재활센터를 소개해주었습니다. NA모임에 참석하여 정보를 취합한 다음 송천재활센터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3개월 동안의 생활교육을 통해 개인적인 생활에서는 많이 회복되어 직업재활로 미용학원에 등록해 미용기술을 배워 필기까지 합격하는 기쁨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직업재활교육을 받기 위해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점점 더 다양한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핸드폰을 사고 싶고, 더 좋은 직업도 갖고 싶고, 더 많은 돈도 벌고 싶고---’이런 생각이 더욱 커져감에 따라 내 모습은 더욱 더 초라해져갔습니다. 결국 프로그램에서 이탈하여 다시 약물을 하게 되었고 다시 1년 동안 수형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철저히 단련하고 준비하다.

   교도소에서 내가 넘어진 이유를 계속 탐색해 보았습니다. ‘준비가 덜 되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정말로 가능한 모든 것에 더 철저히 준비하고 단련하고 싶었습니다. 출소하기 며칠 전부터는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갈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가면 아주 무너지는 것이고 송천재활센터로 오면 사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는 다시 돌아와 기도를 하면서 열심히 재활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있는 마약중독자의 치료모임인 NA모임에도 나오면서 나를 비롯한 약물중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유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는 내 본 모습을 알게 되었고, 약물이 끼치는 병폐를 가슴깊이 새기며 긴장을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잘 훈련받아 앞으로 미용학원에 꾸준히 계속 다니며 미용사가 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봉사하는 마음도 함께 말입니다. 이곳 재활센터 식구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싶고 그만큼 남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는 잘 압니다. 본드가 얼마나 치명적인 해를 끼치고, 사람을 얼마나 바보로 만드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추잡한 일인지도 잘 알지만 약물중독에서 벗어날 힘이 아직까지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씩 쌓아 오던 신앙에 더욱 의지하게 되었고, 신의 보살핌과 보호하심을 바라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길만이 내가 사는 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오기가 생겨 평생 단약에 도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곳 재활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며 공부와 기도로서 치유되어 가는 내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잘 치지는 못하지만 기타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면서 내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바로 미용학원에 다니게 될 것 같아 기쁘며,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회복의 길을 가겠습니다.

   큰 누나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다시는 약물을 하지 않을 것 입니다. 아직은 혼자 서지 못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할 것 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나도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가벼이 나는 기분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 하고 싶습니다.

   회복의 길을 걸어가게끔 도와주시는 여러 지인들께도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으며, 약물은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마약체험수기를 통해 더욱 그 빛이 더 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수기의 글을 여기서 마칩니다.

 
 
<2007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2"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