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내어, 단약의 길을 닦겠다 -이 현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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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유학지에서 약물을 접하다.
나는 서울 외곽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세상에 태어날 때 나는 분명히 울었겠지만 내주변의 모든 사람은 나의 탄생에 기뻐서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세 살 위 누나는 지금도 나를 사랑해주고 세 살 터울의 여동생과의 어린 시절은 우는 일보다 웃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성실한 분이셨고 어머니는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나를 키우실 때 그렇게 방관하지는 않으셨다. 사춘기 때 반항심으로 술을 마시고 집 유리창을 깬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한술 더 떠서 남은 유리창마저 깨뜨리는 결단성을 보이셨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게 거는 기대에 맞춰 나는 자라났다.
대학을 다녔고 전공도 내 성향에 맞는 것이어서 열심히 배웠다. 2학년을 마치고는 군에 입대해서 국민의 의무를 다했다. 나는 쾌활하고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였다. 제대 후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영어를 익히게 하시려고 호주 유학을 주선해 주셨고, 나도 영어를 배워 두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유학을 떠났다.
내 나이 23살 지금 생각하면 아직 어린 젊은이였지만 그때는 다 큰 청년으로 거칠 것이 없었다. 머리도 좋아서 공부도 잘했다. 처음 호주에서 살던 곳은 홈스테이, 우리나라 하숙촌같이 유학 온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나는 새로운 세상이 주는 환희에 들떠있었다. 자유분방한 문화는 규범과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던 내겐 천국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께선 나에게 차까지 사주시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 그룹의 리더가 되었고, 그들도 나를 잘 대해 주었다.
그때 처음 약물을 접하게 되었다. 호기심 반 충동 반, 아이스라고 부르는 히로뽕과 코카인 종류였다. 대마초나 다른 약물은 흔했지만 나는 그런 것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런 약물들을 조금씩 즐겼지 완전히 빠져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나는 카지노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후리베이스를 하고 카지노에 가면 온천지가 내 뜻대로 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그것에 빠지게 된 것이다.
따기도 했지만 잃기를 더 많이 해서 나중엔 차까지 팔아서 날려버렸다. 당연히 연수는 잘 되지 않아 이런저런 핑계로 아버지를 설득해 귀국길에 올랐다. 엄마는 언제나 내편이셔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때는 그런 정도의 일탈은 사실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귀국하여 열심히 생활하다.
소위 말하는 정크는 아니었기에 귀국해서 복학을 한 나는 공부에 취미를 붙였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내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나는 무사히 대학을 마쳤고, 26살 졸업한 그해에,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굴지의 여행사에 취직하여, 영업판매실적을 월등하게 해내는 성과를 이룬다. 훨칠한 키에 호남아인 나는 다른 사람들과 아주 쉽게 가까워지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고 27살의 나는 직접 여행사를 차렸다. 그때는 해외여행이 전보다 많았었고 내주변의 사람들만으로도 스케줄이 넘쳤었다. 여행사 업무는 비행기 티켓팅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지의 호텔이나 상점가에서도 많은 수입이 생겼기에 삼십을 갓 넘겼을 무렵에 나는 수십억을 만지는 청년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당시에 유행하던 룸살롱이나 카페를 섭렵했고 화류계에선 꽤 이름을 날렸다.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약물의 세계에 발을 딛다.
그러던 중 31살로 나와 동갑이었던 대기업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과 운명적인 만남이 생겼다. 그는 말 그대로 VIP였기에 그가 여행을 떠날 때면 내가 직접 에스코트를 맡아서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는 마약사용자였다. 그는 내게 약을 구해줄 것을 원했고 나는 약을 구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내 혈관에 주사바늘을 꼽고 말았다.
그 경험은 내가 태어나서 누렸던 그 어떤 경험보다 강력했다. 나는 마치 내가 신이 된 듯한 황홀감을 누렸다. 내 눈동자는 전보다 더 뚜렷하게 사물을 보았고 내 감각은 발끝까지 살아나 온 전신을 싸고돌다 내정수리에서 터져 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평생 내 기억을 관장했다, 그렇게 나는 다른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야말로 원나잇 방콕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나는 무려 5년이라는 세월을 약과 더불어 살게 된다. 태국은 약물의 천국이었다. 나는 그 천국의 신이었고, 종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숙소였던 ◯◯호텔에서 그 재벌가의 아들이 투신자살을 했다. 다음날 사건은 큰 파장을 불렀다. 태국방속에선 연이어 보도했고 결국 그 여파로 나는 추방당했다. 그 충격으로 약을 끊었지만 그 기간은 3개월을 채 못 넘겼다.

약물로 모든 것을 날리다.
나는 국내에선 약을 해보지 않아서 내가 약을 할 수 있는 곳은 외국뿐이었다. 드디어 나는 약을 찾아 필리핀으로 가게 된다.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나를 약물과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내가 가진 돈은 지금 생각하면 나를 파멸로 이끈 도구였다. 나는 약물과 여자와 도박으로 그 많은 돈을 날렸다. 내 하루는 약물이 깨웠고, 약물이 잠재웠다. 그렇게 4년을 살았다.
그때까지도 부모님이나 가족 누구도 내가 약을 하는 사실을 모르셨다.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더 큰 거짓말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만 하고 내일은 예전에 나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은 나를 하루살이로 만들었고 나는 점점 비참해지고 있었다.

회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다.
결국 나는 귀국해서 송천재활센터에 입소하게 된다. 나는 약을 끊기 위해 까다로운 이곳의 규칙도 지켰고, 나와 다른 사람들 틈에서도 견디어 내야만 했다. 3개월 과정을 마치고 퇴소했다. 나는 약 생각을 떨쳐냈다.
그 후 3개월을 단약하다가 다시 사업을 빌미로 3박4일의 일정으로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것은 핑계였다. 나는 다시 약물과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6개월 후 나는 완전한 패배자였고, 고아였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다시 맞아주셨다. 나는 곧바로 다시 송천재활센터에 입소했다. 이제 나는 입소한 날을 내 생일로 여기고 살려고 한다. 그동안 이곳 송천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보다 많은 자유가 주어진 대신 느끼는 책임감은 더 많아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우리식구들 모두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나와 같은 병을 앓았으나 신상의 힘으로 극복하고, 목사까지 되신 분을 만나 신상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NA를 통해 점차 회복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를 되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새벽길도 마다않고 교도소로 메시지를 다닌다. 신앙과 감사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전해져서 다함께 단약의 길로 가길 원한다. 나는 씩씩하게 그 앞장에 설 것이다.
부모님도 기뻐하신다. 그것을 나는 내 보람으로 삼을 것이다. 회복의 과정에서 변덕도 찾아오지만 나는 그것을 이겨 낼 것이다. 나와 같은 우리가 있으니까.

마약으로 지역사회에 망하는 모습을 보다.
마지막으로 나는 교도소에서 만나는 많은 마약류 사범들이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듣곤 한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두어 놓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약에 미쳐 필리핀의 어느 지역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동네는 완전히 마약소굴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마약과 연루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마약을 팔러 다니고, 여자아이들은 마약에 취해 몸을 팔았고, 어른들은 늘 약에 취해 있었다. 나도 미친놈이었지만 그곳에서 어떤 희망도 볼 수 없었다. 돈도 떨어지고 마약을 동냥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확 찾아왔다. 박차고 그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와 회복의 길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