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86. Autumn, 2017

 

  함께하는 마약퇴치 _ 마약류 중독자 체험수기

하늘을 날거야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II 中>
 

나는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충북의 한 소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원래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지만 서울ᆞ단양 등 이곳저곳 이사를 했던 기억뿐, 나의 삶이 시작된 곳은 바로 그 소도시로 이사 온 7살의 초등학생 때부터입니다. 그곳은 바로 제 2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위로는 3살 위 누나와 한 살 위 누나가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 붐이 한 창 일어났던 암울하고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대 탓이었는지 큰 할아버지께서 아버지 몰래 한 살 위 누나를 어딘가로 입양을 보내 지금까지 생사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도박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도무지 갚을 여력이 없게 되자 아버지와의 다툼이 심해졌고 결국 어느 날 밤 자식들을 버리고 멀리 떠나셨다고 합니다.

꼬마아이였던 나와 큰 누나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자라게 됐습니다. 이렇게 세 식구가 이 소도시로 이사 와 살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직장을 다녔고 매달 월급의 반을 할머니 통장으로 부쳐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우리 세 식구는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지만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엄마ᆞ아버지를 애타게 찾거나 그리워 한 적이 별로 없었던 아이였습니다. 철부지인 나는 그저 오락실과 딱지치기ᆞ숨바꼭질 등 아이들 놀이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중 2때까지도 공부는 반에서 중간 정도였고, 동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학교와 집 밖에 모르는 보통 아이였습니다.

낯선 친구와 어울리면서 불량 청소년이 되다

중3 봄에 영세민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습니다. 못사는 사람들이 이 아파트로 대거 이주해 왔습니다. 바로 불량 청소년이 많은 곳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학교를 전학하진 않았지만, 방과 후엔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았던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지게 됐고 낮선 선후배 즉 불량 청소년과 어울리게 됐습니다.

이때는 할머니와 단 둘이 생활했는데 사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낮선 환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목말라 했습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들의 춤을 배우고 싶어 불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춤을 배우고 이런 과정에서 술과 담배를 하게 됐습니다. 숨어서 하던 술과 담배를 공원 한복판에서 판을 벌일 정도로 심하게 하게 됐습니다. 이때까지도 불량 청소년 사이에서 본드를 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드를 처음 만나다

어느 날 제일 친한 친구였던 강○○가 다른 곳에서 본드 하는 것을 배워 와선 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난 본드를 처음으로 불게 됐습니다. 본드가 주는 환상과 쾌락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줬습니다. 본드를 불며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난 이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며 도둑질ᆞ폭력ᆞ노상강도 등으로 내 욕구를 충족시켰고 친구들과 함께 비슷한 또래 여자들에게 못된 짓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점점 친구들과 어울려 본드를 하게 됐고 거의 대부분의 불량친구들도 본드 마니아가 됐습니다. 당시엔 한 달에 2∼3번 정도 본드에 취했던 것 같습니다.

약물을 한 상태에선 자아와 이성이 흔들리기 때문인지 그런 행동이 나쁘다거나 범죄라고 인식하진 못했습니다. 내 인격은 악하게 변해갔고 본드만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줬습니다. 친구와 가족보다 본드가 더 좋았고 내 관심은 온통 본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으며 본드를 하지 않은 맨 정신에선 도무지 삶의 재미를 맛 볼 수가 없었습니다.

 

‘유해화학’이란 죄명으로 수감되다

그러던 중 난생 처음 경찰서 유치장에 ‘유해화학’이란 죄명으로 수감됐습니다. 다행히 초범이고 고1 학생이었기 때문에 금방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사회에 다시 발을 내딛은 난 그때까지도 약물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또 계속적으로 본드를 흡입하게 됐습니다.

신의 노여움을 샀던지 혹은 방탕한 모습을 도무지 참을 수 없으셨는지 또다시 같은 죄명으로 구속됐고, 이번엔 10개월의 형량을 받고 ○○소년원으로 넘어가 살게 됐습니다. 학교는 결석일수 70일이 넘으면 자동으로 자퇴 처리가 돼 어쩔 수 없이 더 다닐 수 없게 됐습니다.

10개월을 살고 나온 후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동네에선 ‘본드 하는 놈’으로 소문이 쫙 퍼져 친구 부모가 나를 만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연히 정말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됐고 주위엔 더욱더 불량 친구들만 남게 됐습니다.

처음으로 유흥업소 웨이터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때까지도 약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난 틈틈이 약물을 했고, 남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골목길이나 야산 같은 곳에 가서 밤낮으로 본드를 분 적도 있습니다. 웨이터일도 그만 두게 되고 그냥 집에서 놀면서 집안에서 본드를 불며 할머니를 괴롭히게 됐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아파 잘 걸어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몸으로 할머니는 자꾸만 본드를 불지 말라고 하시며 빼앗곤 해 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자꾸 본드가 담긴 봉지와 니스 병을 숨겨 놓았습니다. 결국 할머니께 대들기도 하고 뺏기도 하고 욕도 하게 됐습니다. 그만큼 내 안에는 악마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회 탓, 가정 탓으로 돌리며 삶의 권태를 느낀 난 처음으로 동맥을 칼로 그어 자살까지 시도했습니다. 한번은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뛰어내릴까 하는 자살충동도 느껴본 적도 있었습니다. 좀 아이러니한 것은, 난 더욱 더 약물에 빠져 들어갔는데 함께 어울렸던 불량한 친구들 대부분은 본드를 하다가 더 이상 하지 않게 됐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른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결국 나만 외톨이가 되고 약물을 하는 악순환이 계속 됐습니다.

 

악순환이 이어지다

교정시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바로 약물에 취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집에서 쫓아내려 하셨고 친구들과 동네 사람의 외면은 더욱더 심해져 갔습니다. 누구 하나 날 똑바로 일으켜 줄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도 새롭게 살려는 마음을 먹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들같이 살려고 노력해 봤지만 도무지 길이 열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날 그렇게 신경 써 가며 돌봐주려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대 중반까지 교도소를 들락날락 하면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도소에 있을 때 할머니께서 임종하셔서 손자 얼굴도 보여드리지 못했고 주위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얻은 거라곤 전과 기록과 사회의 냉대와 질시뿐이었습니다. 중독성을 망각한 채 심심하든, 기쁘든, 뭐든 본드를 하게 된 것은 아까운 10대와 20대 청춘의 반을 본드와 맞바꾼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치료 받았지만 본드 충동은 그대로 남아

교도소 생활, 치료감호소 생활을 했지만 무엇보다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치유(완전한 회복)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치료는 받았지만 내 안에 본드 충동이 조금도 줄지 않는 바로 그것이 날 미치고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는데, 본드를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던 점입니다. 어릴 때 하나님의 임재(기독교도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를 경험해본 나는 교도소 생활 틈틈이 성경을 봤고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도하면서 도와달라고, 약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치료감호소 약물병동의 간호사가 NA모임과 재활센터를 소개해줬습니다. NA모임에 참석해 정보를 취합한 다음 재활센터에 입소하게 됐습니다. 처음 3개월 동안의 생활교육을 통해 개인적인 생활에선 많이 회복됐습니다. 직업재활을 위해 미용학원에 등록하고 미용기술을 배워 필기까지 합격하는 기쁨을 가졌습니다.

직업재활교육을 받기 위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다양한 유혹을 받게 됐습니다. 더 좋은 핸드폰을 사고 싶고, 더 좋은 직업을 갖고 싶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고.... 이런 생각이 더욱 커져감에 따라 내 모습은 더욱 더 초라해져갔습니다. 결국 프로그램에서 이탈해 다시 약물을 하게 됐고 다시 1년 동안 수형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퀸시의 고백이 의미 있는 이유

마약중독자라고 하면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 시절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완전 폐인이 돼 몸을 벌벌 떨면서 구걸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중독자 가운데는 일반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므로 쉽게 감별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비단 마약뿐이랴? 알코올 중독자도 카페인 중독자도 수면제나 판피린 중독자도 평상시엔 타인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이 중독 상태를 감출 수 있음이 인체의 특징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가 중독자임을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남다른 시선으로 주목해야 한다. 그런 작가가 영국의 토마스 드 퀸시다. 1785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약 2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이름에 ‘드’(de)가 붙은 것으로 그가 귀족가문 태생임을 알 수 있다. 귀족이면 어떻고, 노예면 어떠랴. 더 중요한 건 아편에 중독됐던 그가 이 중독의 문제점을 상세히 밝히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편의 위험성을 널리 알린 최초의 작가란 점이다. 당시는 아편의 중독성도 모른 채 많은 계층의 사람이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쉽게 아편을 복용했고 그 결과 쉽게 중독이 됐던 시절이었다. 그의 고백에 귀 기울여 보자.

아편 복용 후 1시간이 지나자 찾아온 격변

1804년, 퀸시가 대학생이 된 19세 때 처음 아편을 복용하게 된 계기는 치통에서 연유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날마다 머리를 감는 습관을 가졌다. 하루는 치통이 심해 머리를 감지 않게 되자 스스로 나태해졌다는 생각에 자다 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찬물에 머리를 담근 후에 말리지 않은 채 다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엔 치아뿐 아니라 얼굴과 머리 전체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됐다. 퀸시의 이런 증상은 오늘날 진단 내리자면 안면 신경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쉼 없는 통증을 20일간 겪었다. 21일이 되는 날 통증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으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우연히 한 대학 친구를 만났는데 그가 아편을 소개했다. 퀸시도 아편이 암부로사라고 부르는 ‘신의 음식’이란 지식 정도는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약인 줄은 몰랐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비 내리는 옥스퍼드가(街)를 지나며 한 약국에 들렀다. 일요일에 근무 중인 약사는 따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아편을 건넸다. 퀸시가 1실링을 내자 반 페니 동전을 거슬러주며 알코올에 녹인 아편팅크를 준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편을 복용한지 한 시간이 지나자 퀸시에게 최고의 격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