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로 채워진 과거 - 정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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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벌써 마흔둘.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후회뿐이다. 그러나 후회만으로 살아야 할 것이 아니란 걸 지난 3년 동안 단약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아버지는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여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 당시의 보통 집안처럼, 아버지는 매우 엄했고 어머니는 항상 자애로웠다. 나는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큰 기대를 받고 자랐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직접 한자를 배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 반장을 했고, 방과 후에는 무조건 공부를 해야 했다. 당시 아버지는 오토바이 광이셨는데, 딴 짓을 하다가도 오토바이 소리만 나면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아버지는 밤12시고 1시고 시간 개념 없이 집에 돌아오시면 매일 공부를 가르쳤다. 항상 회초리는 옆에 두셨다.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었으나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공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때까지 계속 반장을 했고 성적도 매우 좋았다. 4학년 2학기에 들어서 아버지 공장이 파산하게 되자 다른 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사 후에는 철물점을 하시면서 조그만 공장도 다시 시작하셨다. 이 일로 아버지는 나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내 자신도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여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집에서는 다시 과외공부를 시켜주었으나 중학생이 되자 혼자 공부해야 한다고 과외를 중단시켰다. 결국 더욱더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사춘기로 접어든 나는 공부외의 다른 곳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책가방에는 교과서는 없고 만화책과 나쁜 책들만 넣고 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안 한다고 한겨울 밤에 발가벗기고는 밤새 집밖에서 벌 을 서도록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나를 때렸다. 또한 한 얘기를 계속해 진저리가 나게 하였다. 어떤 때는 하루 반나절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기도 했다. 결국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시작했고, 반항의 수단으로 담배며 본드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 안과 밖에서도 틈만 나면 본드를 불었다. 아버지와의 불화는 더욱 커져갔고 결국 가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에 다닌 것을 다 합해도 한 한기 정도에 불과했다. 주위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고 자연적으로 불량청소년이 되었다. 늘 패싸움을 하였고 싸움은 독하게 했다. 그래서 독종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불량청소년과 어울리면서 학교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낮에는 당구장,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이트클럽에서 DJ를 하면서 필리핀 밴드들과 친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밴드의 리더가 작은 알약을 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며칠 후 그것이 환각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들로부터 20알 정도를 얻어먹자 배가 뒤틀려 화장실에서 계속 구토하였 다. 너무 힘들어 테이블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꿈을 꾸는 듯한 환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저녁만 되면 매일 약을 하게 되었고 점점 빠져 들어갔다. 이후 호스트바에서 3년 정도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이곳에서 우연히 손님으로 찾아온 일본여성고객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필로폰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필로폰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다른 약물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던 나는 좀 달라고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나에게 주사를 놔주었다. 그녀가 나를 찾아 한국에 오는 빈도가 많아질수록 더욱더 마약에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날 즈음, 호스트바 사장이 나와 일본 고객과의 관계를 알게 되자 일본고객과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요구했고, 그 일본고객은 더 이상 호스트 바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마약을 중단하고자 노력했으나 금단증상의 고통으로 어쩔 수 없이 옛날에 사용했던 알약을 대용하게 되었다. 얼마 후 호스트바에서 5년 연상의 미국 여성을 만나 동거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사업으로 바빠 집을 비우게 되는 일이 많아지자 나는 그녀에게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바에 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낙했고, 이태원 나이트클럽에서 카운터 일을 맡게 되었다. 클럽에서 많은 여성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동거녀와의 다툼이 많아졌다. 다툼이 일어나면 나는 화를 내고 집을 나와서는 어수선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약을 먹었다. 또한 일이 끝나도 약을 구해서 먹기까지 되었다. 미국 여인과 동거하던 기간이 2년이 지날 즈음, 클럽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클럽 마담아가씨가 술에 너무 취해 택시를 잡아주려고 했는데“도와달라면서 나에게 기대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집까지 함께 와 방 열쇠를 찾으려고 그녀의 손가방을 열었더니 몇 개의 주사기가 있었다. 주사기를 보자 가슴이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일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마약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 결국 그녀와 같이 마약을 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침대 밑의 상자에서 부서진 나뭇잎을 보여주면서 이게 대마초라고 하며 함께 피우자고 하였다. 대마초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처음 접해보는 것이라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해보게 되었다. 대마초를 피웠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고 단지 쑥 타는 냄새 비슷한 것만 느꼈다. 그러나 1시간 정도 흘렀을까 기분이 좋아지면서 온 몸이예민해지고 성적 충동이 솟아올랐다. 이후 틈만 나면 그녀를 찾아 마약과 대마초를 했다. 이런 이중생활을 3년 정도 했을 때, 미국인 동거녀의 갑작스런 본사 발령으로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허무하면서 외로웠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더욱더 마약에 빠져들었고 클럽 마담의 집에서도 계속 마약에 취해 살았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집에 와보니 동거녀로부터 영어편지가와 있었다. 영어를 몰라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던 나는 그 편지를 갖고 호스트바의 사장을 찾아가 사장으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미국의 동거녀는 함께 살았던 집을 팔아 조그만 장사라도 하면서 계속 연락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단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을 팔고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 앞에서 카페를 차렸다. 장사라도 하면 마약도 안하고 모든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골도 많아지고 카페는 잘 운영되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자 단조로운 생활이 점차 싫증이 났고 시간적 여유가 없다보니 너무 갑갑했다. 이때는 며칠에 한번정도로 대마초는 했지만 필로폰은 하지 않았다. 절제하면서 끊고 싶었 지만 내 힘으로는 되지 않았다. 카페를 한지 만 4년 만에 처분하고 옷 가게를 하였다. 옷가게를 하면서 알고 지내던 여성과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결국 옷가게를 정리한 다음 용산전자상가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컴퓨터 가게를 운영하였다. 수입도 좋았다.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한번은 용산전자상가에서 동남아로 외국 출장을 갔다 온 친구가 이상한 알약을 몇 개 가지고 와서는 먹어보라고 하였다. 한 알을 먹어서 무슨 효과가 있느냐고 반문하자 태국에서 몇 번 해봤는데 효과가 있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먹었다. 얼마 지났을까, 몸에 약간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 먹었던 약과 대 마초를 같이 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친구들이 술 먹으러 갈 때면 나는 술 대신 약을 사용했다. 약 이름은 몰랐지만 1개 이상은 먹지 않았다. 정신이 흐트러지면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마약을 접하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 그 약을 다량으로 구입해 줄 것을 문의하자 그 친구는 위험해서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용산전자상가 생활도 2년이 넘은 어느 날, 옆 건물의 사장이 사기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나 자신도 그에게 가진 전 재산을 사기 당하고 결국 가게를 닫게 되었다. 내가 가진 재산이라곤 가게를 정리한 돈 3천만 원과 전세 집 그리고 차 한대 뿐이었다. 당시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였던 여인이 있었다. 양가 부모로부터 결혼을 승낙 받고 행복에 들떠있던 시기에 터진 이 사기사건은 나를 다시 절망케 했다. 전세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약을 구하고자 옛날 마약했던 곳을 돌아다녔으나 모두 없어졌다. 물어물어 ○○지역에 가니 한 아주머니가 접근해서 알약을 두 봉지 구입하여 모두 먹고, 정신을 잃었다. 약혼녀는 나에게 이상한 징후가 보이자 나의 뒷조사를 하였고 결국 사기사건과 마약을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당시 나는 늘 약물에 취해 있었고 약물이 없으면 뭔가 실연당한 사람 처럼 억울해 하면서 하염없이 우는 등 우울증 증세에 시달렸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내가 떠나는 것이 사랑하는 약혼녀를 위한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집을 떠난지 15년 만에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생활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약혼녀와 헤어져 좀 이상해졌다고 느낄 뿐이었다. 집에서도 끊지 못하고 몰래 대마초를 조금씩 했다. 결국 어머니는 나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독방에 갇히고 온몸을 묶이고…. 3개월이 지나자 약간 적응이 되었으나 정신병원에 왔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고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6개월 뒤 퇴원하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약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약을 구하지 못하고 알약과 대마초를 하면서 신세한탄만 거듭하며 방황하다 결국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 3일 만에 깨어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한 다음부터는 어머니의 패물 등 돈이 되는 것을 훔쳐 전당포에 맡기고는 약물을했다. 약물에 취해 아무데서나 자고 노숙자들이 밥을 먹는데서 밥을 빌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일주일동안 밥도 먹지 않아 산송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지하철 안에서 쓰러져 눈을 뜨니 정신병원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사고를 쳐 강제퇴원을 당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약물 중단을 위한 혈서를 쓰고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나를 위한 일자리는 없었다. 정수기 외판업은 오히려 나를 골치 아프게 했고 삶에 회의를 들게 해 다시 우울증을 겪게 하였다. 나는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퇴원한 다음, 직업을 계속 찾았다. 수많은 곳을 두드렸으나 나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대형 회집 지배인으로 채용되었다. 월급은 그런대로 만족했지만 너무 힘들었다. 열심히 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의지와 달리 몸이 말을 듣지않아 두달이 채 되지 못해 포기하고 말았다. 마약에 대한 유혹이 항상 따라다녔고 몸이 지칠수록 마약의 충동은 더욱 강해졌다. 나는 직장을 포기하고 멕시코를 경유해서 미국에 들어갈 생각에 마약이나 실컷 하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흥청망청 쓰고 다녔다. 얼마 되지 않아 경찰에 잡혔고, 경찰서에서 죄가 없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경찰과 싸우게 되고 결국 검찰에서 악질로 찍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때가 1999년. 초범이라 47일 만에 구치소에서 출감했지만 즉시 마약을 하러 다녔다. 완전히 마약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고 경제적으로도 완전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부모도 호적을 파서 나가라고 말할 뿐 받아주지 않았고 동네에서도 나를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고는 그 길로 집을 나와 노숙자가 되었다. 아버지와 다툰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약물을 끊어보자는 생각에 병원 입원을 요청하였고, 당시 노숙자 신분으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마약을 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퇴원 후 직접 찾아갔다. 마약퇴치운동본부의 송천쉼터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몇 사람이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는 쉼터 식구들과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냈으며 보람을 찾게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마약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다고 단정했지만 마약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내 모습에 기분이 너무 좋았고 아침이면 몸이 개운하고 상쾌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유혹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모태신앙이었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송천쉼터 생활 7개월이 되자, 나는 인천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일을 도우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당뇨라는 고질병이 있어 다시 송천쉼터로 되돌아왔다.(마약을 너무 오래해서 당뇨가 매우 심하고 이빨도 20개 정도 빠졌다) 송천쉼터는 집같이 편하고 좋았다. 잃어버린 나를 송천쉼터에서 찾았고 성숙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 힘들었던 생활이 보람으로 바뀌었다. 더 나아가서 나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형제들을 도울 수 있는 도우미로 변한 내 모습에 감사한다. 이렇게 된 것은 나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송천쉼터가 내가 단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쉼터생활 하면서 나는 1년 동안 일기를 썼다. 지난 일을 반성하며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게 제발 도와 달라고 기도하며 항상 일기 마무리에는 아멘으로 끝을 냈다. 과거에는 약물재활공동체가 없어 마약을 어떻게 끊어야 되는지조차 몰랐고 문제를 말할 수도 없었다. 수 없이 병원에 입원했지만 말썽만 부려 독방에 묶였던 기억밖에는 없다. 그러나 송천쉼터에서의 생활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은 신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이 되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신학생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약물과 싸우며 고통과 고난에서 시달리는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을 도우는 도우미로 변한 내가 뿌듯하다. 지금까지 이렇게 혼자 설수 있을 때까지 무수히 나 자신과 싸웠다. 지금도 싸우고 있다. 아니 영원히 계속 싸워야 할 것 같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식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마약을 했던 사람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과거의 아픔도 남아있을 것이고 회복의 기쁨도 간직하면서 꾸준하게 성실하게 겸손하게 살길 원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으니까. <2006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 에서 발췌>